2011년 9월 17일 토요일

나니아 연대기.............그리고 C.S. Lewis가 그려낸 복음

죠이선교교회 김형익 목사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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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감사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 정말 처음으로 조앤 롤링에게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써서 내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그녀에게 그리 고운 시선을 던질 수 없었다. 해리 포터가 아주 마귀적이라고 보는 보수 기독교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유용하지 않은 마술 같은 것으로 허황된 세계에 대한 그림을 심어주는 것 같아서 그 영향에 내심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녀에게 감사한 생각이 든 것은 그녀가 아니었으면 C. S. Lewis의 <The Chronicles of Narnia>(이하, ‘나니아 연대기’)가 결코 영화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사실 여부는 Peter Jackson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지만, J. R. R. Tolkien의 <The Lord of the Rings>(이하, ‘반지의 제왕’) 3부작 역시 조앤 롤링이 없었으면 영화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정말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판타지 문학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서 톨킨과 루이스의 그 의미심장한 소설들이 만들어지는 상황적 계기가 생겼다는 것은 정말 그녀 자신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기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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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와 ‘나니아’에 기독교 세계관을 담아낸 톨킨과 루이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모두 헛된 마술로 가득찬 통속적 판타지 문학이 아니다. 톨킨은 카톨릭신자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반지의 제왕>안에 그가 만들어낸 ‘중간계(Middle Earth)’ 안에 놀랍게 담아냈다면, 톨킨과 함께 옥스퍼드의 영문학 교수였고 평생의 친구이기도 했던 루이스는 성경 속의 세계관을 그가 창조한 ‘나니아(Narnia)’라는 세계 안에 재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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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되고 인용되는 <나니아 연대기>
>내가 <나니아 연대기>와 루이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영미권 학자들의 책을 읽는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의 이야기 토막들을 인용하는 것을 읽으면서이다. 그런데 이야기 전체를 알지 못하니 당연히 이해를 못할 수 밖에. 그러나 후에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왜 그렇게 많은 저자들이 루이스와 그의 <나니아 연대기>를 인용해서 설명하고 싶어했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가끔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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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루이스
>루이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자는 아니다. 목사는 더욱 아니다. 그는 신앙적 배경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영국 성공회 교인이었고, 직업은 옥스퍼드 대학의 영문학자요, 교수였다. 그러나 그가 지적 회의로 인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다가 결국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의 탁월한 언어능력을 통해 신학자들이 신학만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성경의 진리들을 평이하게 소개하는 명저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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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의 세계
>이제 나니아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제이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피해 영국 시골로 간 네 남매가 겪게 되는 환상의 세계 나니아,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바로 <나니아 연대기>다. 그들이 경험하는 나니아의 세계가 너무나도 성경의 유비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성경의 이야기에 익숙한 이들은 보면서 자동적으로 ‘아!’하는 느낌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언젠가 복음을 접하면서 깨닫는 때가 올 것이다. 나니아의 성경적 유비들에 관하여 설명하는 책들이 많이 있지만 그저 몇 가지 내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인 대목들을 조금 설명해보려고 한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던져볼 수 있는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 될 것이다:
>나니아는 어떤 세계인가?
>아슬란은 누구인가?
>에드먼드가 가진 약점은?
>마녀는 누구인가?
>나니아에서 겨울이 거의 다가고 봄이 옴
>그리고—꽃망울들이 일어남
>아슬란의 죽음 약속과 에드먼드의 구원은?
>마녀가 아슬란에게 찾아와서 주장한 나니아의 약속(법)은 무엇인가?
>아슬란이 죽기 위해 올라간 돌탁자(the stone table)은?
>그 돌탁자는 왜 아슬란이 부활할 때 깨어져 내렸는가?
>아슬란이 죽을 때 끝까지 따라갔던 두 아이 수잔과 루시는 누구이며 무슨 의미인가?
>나니아가 다시 회복되고 네 남매가 왕이 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
>나니아는 어떤 세계인가?
>인성이가 수년 전 한국에서 나니아를 다 읽고 나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을 잊지 못한다. 어린 아이가 이 책을 읽고 직감적으로 나니아의 세계는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정직하게 작가인 루이스가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영화는 7권 중 한 권만을 영화화했으므로 나니아의 세계가 환상의 세계로 머물지만, 마지막에 나니아는 더 이상 환상이 아닌 현실의 세계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도 미래의 어느 날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루시가 혼자서 옷장을 통해 들어간 나니아의 세계를 오빠들과 언니에게 말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이야기해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현실 세계에서 천국을 맛본 사람만이 천국을 알고, 천국을 사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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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아슬란의 의미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듯이 사자 아슬란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한다. 왜 사자일까? 요한계시록 5:5에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예수님을 묘사했다. 나는 루이스가 훨씬 광범위하게 알려진 예수님의 상징인 양으로 아슬란을 묘사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양은 본래 힘이 없다. 사자는 왕이다. 기품과 위엄을 가지고 있다. 두려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돌탁자(stone table)에 올라가 목숨을 내어준다. 사자가 스스로 양으로 오셨다.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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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누구인가?
>마녀는 비록 지금은 나니아를 다스리고 있지만, 그것은 아슬란이 올 때까지일 뿐이다. 비록 지금 사단은 ‘이 세상 신’(고후 4:4)이며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서 이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이다. 아슬란이 등장하자, 나니아는 겨울이 물러가고 얼음들은 녹기 시작하고, 나무들은 새 순과 꽃망울들을 돋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책에서는 아슬란의 말을 인용하여, 그녀가 ‘황제의 교수형집행자’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다보니 나니아의 여왕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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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는 우리 자신이다.
>마녀가 준 사탕 맛이 그리워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마녀를 찾아가는 에드먼드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피해를 받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탕이다. 죄 가운데 빠져들어가는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다른 이들이 피해를 받고 상처를 입는 것 따위는 관심이 없다. 사탕만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죄의 마력이 에드먼드에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경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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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아슬란에게 찾아와서 주장한 나니아의 약속(법)은 무엇인가?
>오래 전 황제가 돌탁자에 새겨놓은 강한 마법을 마녀는 아슬란에게 와서 주장한다. ‘나에게 속하는 모든 배신자는 내가 정당하게 처리할수 있으며 배신 행위를 했을 때는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 배신자의 목숨은 마녀의 것이고, 그의 피도 마녀의 것이 된다’는 내용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이것은 율법이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다 에드먼드와 같은 배신자요, 죄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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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의 결정과 에드먼드의 구원, 그리고 아슬란의 죽음은?
>아슬란은 마녀가 에드먼드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그를 죽이도록 내어달라는 요구 앞에서 그녀와 단 둘이 말하겠다고 하고 그의 텐트로 들어간다. 밖에서 기다리는 에드먼드와 형제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긴장하면서 기다린다. 에드먼드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니까. 아슬란은 결정했다. 나니아의 법을 존중하기 위해 에드먼드 대신 자기가 그 돌탁자에 올라가 죽겠다는 것이 아슬란의 결정이었다. 이 협상의 결과를 모르는 자들은 아슬란이 하는 말, ‘문제를 해결했다. 마녀가 에드먼드의 피를 포기했다’는 말을 듣고는 환호성을 지른다.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해결되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돌탁자 위에 아슬란이 올라가기로 함으로써 율법은 성취되었고 마녀는 우리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아슬란은 늦은 밤 홀로 마녀가 기다리는 돌탁자를 향해 가기 시작한다. 루시와 수잔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마치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른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십자가를 상징하고 한 편으로는 율법의 저주 요구를 상징하는 돌탁자 위에 오르기 전, 마녀는 ‘털을 깍으라’고 명한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것처럼 아슬란의 위엄을 벗겨버리고는 찌르고 놀리고 한동안을 조롱한다. 아슬란은 하늘을 올려다본 채 잠자코 당한다. 그리고 마녀의 칼에 죽고만다. 마녀의 말처럼, 아슬란은 너무도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죽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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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이 죽기 위해 올라간 돌탁자 그리고 다시 살아난 아슬란
>루시와 수잔이 죽은 아슬란을 보며 슬퍼하다가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날 때,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뒤를 돌아보자 아슬란이 죽어있던 그 커다란 돌탁자는 무너져 내렸는데 그 돌탁자 둘레에 쓰여져있는 그 법(율법)의 문구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 법은 아슬란의 죽음으로 이제는 효력을 잃었다. 율법의 저주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힘을 잃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그리고 아슬란은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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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들이 살아나다
>부활한 아슬란과 함께 수잔과 루시는 마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 안에 오래도록 마녀의 마법에 걸려 돌로 굳어진 수많은 석상들을 향하여 아슬란이 숨을 내쉬자 그 모든 석상들은 살아나기 시작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을 바로 생각하게 한다(요 20:22).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았던 모든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된 구속사역의 결과로 성령을 받고 살아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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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가 다시 회복되고 네 남매는 왕이 되어 다스리다
>나니아는 이제 회복되었다. 피터, 수잔, 에드먼드 그리고 루시는 아슬란이 네 왕으로 삼아 나니아를 다스리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들은 모두가 다 왕이라고 성경은 선포한다(벧전 2:9).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그들은 다시 옷장을 통하여 돌아왔고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두 세상을 산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하나님의 나라)을 함께 살아간다.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죄인으로 살아간다. 더 이상은 죄인이 아니지만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나니아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마침내 나니아가 더 이상 환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 되는 순간까지 말이다. 우리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나니아를 믿어주지 않아서 루시처럼 속이 상할 때가 많이 있지만, 언젠가 나니아는 모든 사람들의 눈 앞에 현실로 주어질 것이다.
>
>후기:
>나니아를 위하여, 아슬란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는 모습은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삶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너무나 도전적으로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께만 영광!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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